
21년 전 겨울 개봉해 이제는 크리스마스 고전 영화가 된 ‘러브 액추얼리’의 한 장면이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휴 그랜트 분)가 미국 대통령을 향해 던지는 대사다. 자신을 얕잡아보던 이를 향한 통쾌한 일격이자, 영국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문장. 윈스턴 처칠과 데이비드 베컴을 빼면 공통점이 있다. 문화 예술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

당장 무도회가 열릴 것 같은…19세기 유럽 낭만 품은 '바스'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투어

‘브리저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바스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드레스와 턱시도였다면 드라마 장면과 다를 바 없을 듯했다. 거리에 지어진 지 200년이 훌쩍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있는 덕이다. 교외에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바스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 2020년 넷플릭스를 통해 ‘브리저튼’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1800년대 초반의 리젠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시대극이다. 고풍스럽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간직한 촬영지를 찾던 제작진의 눈에 띈 곳이 바로 바스였다.

‘바스 토박이’가 투어를 진행하는 덕분에 촬영 비하인드도 들을 수 있다. 브리저튼 촬영 현장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 하나를 가릴 정도의 거대한 천을 동원했고, 촬영팀 역시 바스 지역사회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기부금을 냈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투어가 끝나면 바스 거리가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인 공기로 차오른다.
산업혁명 시대 '갱들의 거리' 버밍엄
누아르 '피키 블라인더스'

도시 전역에 촘촘한 거미줄처럼 운하가 흐르는 것도 이때의 흔적이다. 버밍엄 내운하 길이를 더하면 56㎞에 달한다. 이는 ‘운하의 도시’로 불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 길이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19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도시는 점차 쇠락하는 듯 보였다. 산업 구조가 바뀌고, 젊은 노동자들이 떠나면서다. 그러나 2013년 뜻밖에 쇠퇴한 도시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넷플릭스 시리즈 ‘피키 블라인더스’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다. 작품은 1차 세계대전 이후 1880~1920년대 버밍엄에서 활동한 범죄 조직 피키 블라인더스의 활약을 그린다. 조직을 이끄는 쉘비 가문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벌이는 암투, 이들을 견제하는 뒷골목 세력과 경찰 조직 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아르, 범죄, 정치까지 어우러진 ‘영국판 야인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인기나 완성도에서 ‘대부’와 비견될 정도다.

드라마가 100년 전 공간을 생생히 담아낸 비결이 궁금하다면 ‘블랙 컨트리 리빙 박물관’으로 향하면 된다. 산업혁명 당시의 버밍엄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해 둔 버밍엄의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건축물과 골목의 디테일이 얼마나 뛰어난지,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든다. 드라마 명장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작품의 팬이라면 골목마다 ‘아, 여기!’ 하며 반가운 탄성을 지를 것이다.
톰 형이 내달렸던 리버풀역…브리짓이 장보던 버러 마켓
할리우드 영화 '미션 임파서블'·'브리짓 존스' 시리즈의 탄생지



1편에서 두 남자가 브리짓을 두고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벌이는 명장면 역시 이 골목에서 촬영했다. 영화 제작진은 촬영 당시 시장 입구를 3일 동안 통제해야 했다. 어떤 촬영인지 궁금해하는 상인들에게 ‘버러 마켓에 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라고 속인 덕에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고.
영화속 주인공처럼…런던 호캉스로 아침을
호텔 더 스태퍼드 런던 & 런더너

이 호텔은 17세기에 지어진 개인 저택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당시 소유주는 스펜서 가문. 영국의 전 왕세자빈 다이애나 스펜서의 바로 그 ‘스펜서’다.
이후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왕실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18세기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를 돌보는 유모의 숙소로 쓰였고, 1912년 호텔로 문을 연 다음에도 버킹엄궁과 이어진 지하 터널을 따라 왕실 가족들이 찾아 바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세계 2차대전 당시에는 미국과 캐나다 장군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호텔에는 전쟁 때 방공호로 쓰인 지하실이 남아 있는데 방독면, 포스터, 사진 등 당시 소품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객실에서는 세월이 묻어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대리석, 마호가니 나무, 무게감 있는 색감으로 꾸며진 공간은 귀족에게 어울릴 법한 호사스러운 분위기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다른 호텔들과 비교해 확연히 넓은 객실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욕조가 큼직하게 자리한 화장실은 웬만한 비즈니스호텔 객실만 하다.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친 현대적인 객실, 마구간으로 쓰이던 공간을 개조해 별장 같은 포근함을 느끼도록 한 객실까지 취향별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머무는 기간 짬을 내 로비 라운지의 애프터눈티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애프터눈티 어워드’에서 ‘숨겨진 보석 상’을 받은 메뉴로 폭신한 스콘과 다채로운 맛의 샌드위치, 아기자기한 색을 뽐내는 계절 케이크, 호텔 블렌딩 티를 마시는 시간은 그 자체로 문화 체험이다.

그렇기에 호텔 주변은 밤낮없이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거리의 소음은 온데간데없고, 은은한 조명과 디자인 가구가 우아하고 럭셔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분위기는 로비 라운지뿐 아니라 객실에서도 이어진다. 편안한 우드 가구에 과감한 색감의 타일을 함께 사용해 고급스러우면서 감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객실 테이블 위에는 눈에 띄는 소품이 있다. 바로 오페라글라스. 호텔이 뮤지컬 극장이 모인 소호 거리에 있다는 점을 재치 있게 보여주는 소품이다. 세면대에서도 극장 분장실을 본뜬 듯한 조명을 볼 수 있다. 또 런던을 ‘예술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미술 전문 가이드와 함께하는 프라이빗 갤러리 투어, 매진된 인기 전시·공연에 입장할 수 있는 VIP 티켓 제공 등 아트 마니아라면 솔깃해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런던·바스·버밍엄=김은아 한국경제매거진 여행팀 기자 una.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