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분야에서는 독일의 작가 괴테(1749~1832)가 자신의 그랜드 투어 경험담을 소개한 <이탈리아 여행>을 출간한 바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1797~1851)도 남편인 퍼시 셸리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그 경험을 소설 집필에 반영했다. 역시 영국 출신 소설가인 찰스 디킨스(1812~1870)도 1년간 이탈리아에 체류했던 그랜드 투어의 경험을 <이탈리아의 초상>이라는 에세이로 남기기도 했다.
미술 분야에서는 영국의 화가인 윌리엄 터너(1775~1851), 프랑스 출신 화가 카미유 코로(1796~1875) 같은 풍경화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보편화됐다. 교과서에서 배운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대신 날씨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직접 보고 그 변화의 양상을 포착해 그린 이들의 그림은 이후 인상주의 미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이후로는 현대적인 그랜드 투어에 참여하는 미국인도 증가하게 된다.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부모는 과거의 그랜드 투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장기간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살아가던 부유한 미국인이었다. 사전트는 이들이 피렌체에 머무는 기간에 출생했다. 당시 세계 예술가들이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이동해 활동하는 일은 많았지만 사전트처럼 부모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리스트의 삶을 살면서 유럽에서 미술 교육을 받게 된 사례는 흔하지 않았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전망 좋은 방’(1985)은 현대화된 그랜드 투어가 일반화된 20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가 1909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행을 떠나는 주체는 상류층 계급에 속한 젊은 여성 루시 허니처치다. 주인공 루시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 르네상스 문화를 학습하며 그곳을 찾은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게 된다.
영화 ‘전망 좋은 방’(1985)이 여행을 마친 뒤 루시는 보수적인 영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인물인 약혼자 세실과 결별하고 대신 피렌체에서 만난 조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조지는 루시에게 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 인물, 즉 전통을 탈피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인물이다. 과거의 그랜드 투어가 주로 남성 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20세기 초 집필된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에서는 여행을 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바뀐 것 역시 변화된 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의 여성 루시는 그랜드 투어를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그랜드 투어를 경험한 과거 예술가들의 작품은 우리를 잠시나마 춥고 엄혹한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안식처이자 눈앞에 펼쳐진 알 수 없는 미래를 벗어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줄 이정표가 돼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