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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 4. 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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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5번진짜안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8,665회 작성일 06-09-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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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월요일, 시내에 나간다. 시내엔 한국인 상점이 있고 거기엔 라면이 있다.

나는 라면만 있으면 대충 식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취생활을 오래해서, 밥보다는 라면이 더 익숙해왔다. 어쨌든 식생활이 완비되면 식생활 이외의 삶도 시작된다.

그런 삶엔 일을 한다거나, PUB에서 London Pride를 마신다거나 면도기를 사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뮤지컬을 본다거나 하는 등의 문화생활도 당연히 포함되어야한다.

그것은 왜 그런가,


독일의 통계학자 엥겔이라는 사람이 발견했던, 잘 살수록 식비의 지출 비율이 낮아진다, 라는 법칙의 강인한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나는 지금 못 살고 있지만(버는 돈으로 간신히 연명한다고나 할까)

엥겔계수(Engel's coefficient)가 높아질까 봐, 그래서 엥겔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일루와, 걸렸어. 넌! 지지리 조또 못살고 개인 복지라곤 안 되어있는 시키야!
버는 돈의 전부를 식비에다 쓰다니!'

라고 얘기할까봐,
어느 월요일 시내에 나가 라면을 사오는 것이다.

해서 식비의 비율을 라면으로 한정짓고, 그 다음엔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엥겔씨를 언제 어디서 만나든 간에

'어이, 엥겔 아냐? 잘 지내? 요즘 통계는 잘돼?'

라고 당당히 말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물론 1996년에 타계한 엥겔씨를 런던에서 만난 다는 건 베컴과 한국의 동네 싸우나 에서 같이 한증막을 즐기는 것 보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_-)

어쨌든 시내에 나갔다가 레미제라블을 보기 위해 캠브릿지 서커스의 어깨가 좁은 여자아이가 걸려있는 낡은 극장의 문을 힘 있게 밀었다.

문은 아무런 소리 없이 열렸다. 매표소 직원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표를 사러 오지 않고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했다.

"가장 싼 표 있어여?"
"그럼."
"주세여."
"13파운드!"
"혹시 더 싼 건?...."
"엄써."

아, 문화생활을 하는 데는 돈이 꽤 든다. 물론 돈을 적게 들이고 문화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문화생활의 골수를 빨아먹을 수 없다. 문화생활의 수박 껍데기 만 핥을 뿐이다.

하지만 내 형편에는 도무지 문화생활이란 게 좀 사치지만, 길거리에서 언제 어느 때 엥겔 씨를 만날지 모르니까 싸구려 좌석에 앉아 비싼 좌석에 앉은 사람의 기분을 상상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오옷 하지만 내 자리는 테러&호러였다.
이런 쉬봉, 무대가 뒤편 반밖에 안 보이잖아. 심지어 내 좌석에는 비지떡이 붙어 있는 듯 했다. <싼 게 비지떡 >이라는 말은 레미제라블을 13파운드짜리 자리에서 본 사람이 만들어낸 말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오오, 그러나 나는 레미제라블을 그 자리에 앉아서 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내 옆 라인에서 멀쩡하게 생긴 백인 남자 둘이서 스마트한 양복을 차려입고 그야말로,

<기둥> 뒤에 앉아서
레미제라블이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 이었다! 나처럼 무대가 반밖에 안 보이는 상태에서 기둥 까지!

오오오! 거기서 보는 사람도 있다! 라는 강력한 위안이 나를 따듯하게 감싸왔다.

그들은 눈빛조차 전혀 좌석에 불만 없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오! 나는 나의 잔인무도한 허영심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실 내 자리인 거의6층 높이에서 무대를 보자면 부끄럽지 않더라도 고개 따윈 들 수도 없
었다. 계속 내리 깔고 있어야 했다-_-;;;)

<* 영어표현 깝죽거리기 뽀나스, my ticket is in the nosebleed section 공기가 부족해 코
피가 날 만큼 높은 곳에 자리가 있다는 표현. 출처 이보영의 영어회화사전. >

레미제라블은 세계 3대 뮤지컬의 하나로 꼽힌다. (이런 걸 누가 꼽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

이건 우리가 흔히 아는 장발장 이야기이다. 아는 스토오리니까 스토오리를 이해하려고 배우들의 노랫말 속에서 플롯을 읽어내야 하는 수고로움은 없다.

은그릇을 훔친 장발장을 용서해 주며 은촛대는 왜 안 갖고 갔냐는 신부로부터 시작해서 장발장이 변심하고(마드렌느로 이름도 바꾸고) 살아가는 장면들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찐한 감동을 먹인다.

지나치게 도식적인 선악구도나 권선징악, 해피엔딩, 이라는 상투성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장발장 스토오리는 음악과 만나 아주 그냥 찐하게 사람을 울렸다.

프랑스 혁명을 준비하던 젊은이들의 전투 장면, 장발장이 다 잡은 자베르를 풀어주는 장면,

자베르가 다 잡은 장발장을 풀어주는 장면, 죽어가는 판틴느(?) 앞에서 코젯을 평생 맡겠다고 약속하는 장면....

줄줄이 읊자면 한도 없을 만큼 이 뮤지컬은 많은 명장면들의 코스요리다. 음악들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배우들은 어찌나 그야말로 완벽하게 연기들을 해내던지 아주 간만에 심한 문화적 과식으로 급체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아! 위대한 문학과 위대한 음악과 위대한 배우와 위대한 무대여!

나중에는 뒷덜미가 아파왔을 정도였던 좌석만 빼면 모든 점이 위대했다. (기둥 뒤에서 끝까지 열심히 보고 열심히 박수치던 그 스마트한 남자 둘, 역시 대단히 위대했다.)

다음엔 어떤 뮤지컬을 보든 비싼 돈 내고 제대로 된 좌석에 앉기로 결심했다.

싼 게 비지떡이라서가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위대함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갈매기들이 밤새 아주 많이 끼룩거리는 밤이다. 저것들이 끼룩거리며 내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영어도 히어링 안 되는데, 갈매기 말이 들릴 리 없지.)

아마도 명절이 다가 오는데 이상한 딴 나라에서 이국적인 표정으로 일상을 살며 이상을 꿈꾸고 있는 동지들 모두 건강하시라는 얘기인 듯싶다.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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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도 Phantom Of The Opera볼때 15파운드던가.. 잴 저렴한 표 구했더만 기둥 바로 뒤였습니다. ㅡㅡ; 거리도 멀고.. 공연 자체는 환상이었는데 참...

6존피플님의 댓글

6존피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늠 재미있어요^^ 자주 글 올리셨으면 하는 바람이..헤헤

people님의 댓글

people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글을 이제야 읽었네요 정말 재미있게 잘적었네요. 아직도 영국에 있으면

제가 오페라에 한번 초대 하고 싶군요. 답글 달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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