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견문 고신뢰 사회 영국의 수능취소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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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윰윰쾅쾅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776회 작성일 20-09-07 20:11본문
올해 예정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00일도 남지 않았다. 석달 후에는 어김없이 수험생들의 듣기 평가를 위해 전국의 공항이 잠시 운행을 멈출 것이고, 택배 오토바이와 경찰차를 이용한 수험생 실어 나르기 소식이 뉴스를 장식할 것이다.
대학입시가 중요한 것은 영국도 다를 수가 없는데, 이번에는 유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 매년 5월에서 6월 치루던 GCSE(고등학교 졸업시험)과 A-Level(대학 입학시험)이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된 것. 한국으로 치자면 2020년도 수능이 취소된 것이다.
황당한 소식에 적잖이 당황한 것은 오히려 외지인은 필자였고, 영국 정부는 되려 자신 만만해 보였다. 영국은 신뢰가 뿌리깊게 자리한 신뢰사회라 스스로 여겼기 때문이다.
신뢰의 나라 영국
영국은 신뢰의 나라다. 세계인들의 가치관을 수십년 째 조사해온 세계가지관조사 (World Value Survey)에서 타인에 대한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영국은 항상 수위권을 차지해왔다.
영국 사람들은 순진해 보일 정도로 남의 말을 잘 믿어 주기 때문에, 때로는 거짓말이 쉽게 통하는 사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TV 라이선스를 구입하지 않고 TV를 보더라도 ‘TV가 없으며 시청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 그만이다 (물론 간혹 점검을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 학생들이 아프다는 둥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수업을 빠져도 ‘멍청한’ 교수는 그 말을 순진하게 믿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러한 신뢰는 한번 무너지면 회복되기 어렵다.
굳이 통계나 일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영어권 국가에서 거짓말쟁이(Liar)는 가장 커다란 모욕이며 정치나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정직하지 않은 사람으로 낙인 찍히면 성공하기 어려우며 곤란한 일을 겪게 된다.
(첨언하자면,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신뢰가 기독교의 전통에서 나왔다고 여긴다. 오로지 나 스스로 신 앞에 마주하여 구원을 청해야 하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개인의 정직을 강조하는 윤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와 군신, 부부와 친구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의 세계관 하에서는 자아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통한 도덕심의 배양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를 규율 짓는 윤리가 더욱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몇몇 동양권 국가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큰 낙인은 거짓말쟁이라기 보다는 조직에 충성을 저버린 배신자 혹은 변절자가 아닐까 싶다)
코로나로 인한 수능 취소와 이에 대한 영국의 해결책
대입시험 취소를 대체하기 위해 영국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일련의 모의고사 점수를 바탕으로GCSE와 A-Level 점수를 각급 학교 선생님이 평가하고, 영국 정부가 만든 통계 알고리즘 (AI)이 점수를 조정한다는 것.
당연히 영국 전역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AI를 통한 평가에서 유리했다는 문제제기가 이어지면서 계급간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한발 후퇴하여 AI를 통한 점수 수정은 제외하고 교사들의 평가를 대입 시험을 위한 최종 점수로 인정했다. 시험 취소 이후 영국 정부의 대책도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 영국인들이 AI의 평가보다 차라리 교사의 평가를 신뢰했다는 점 역시 재미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AI에게 내 평가를 맡길 수 없다!" 거리로 몰려나온 학생 시위대.
(출처: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8171630001#c2b )
한국이었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해결방안이고 이에 대한 반응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능이 취소되는 걸 상상하기도 어렵거니와, 수능 점수를 교사평가로 대체한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공정성 시비가 터져 나왔을 것이다.
개개인간의 신뢰 뿐 아니라 정치적 파당성, 지역적 유착 등으로 쪼개지고, 언론-정치-제도에 대한 신뢰 역시 바닥을 향해 달리는 한국사회에서 교사 뿐 아니라 정치인, 판검사, 기자들까지 AI로 대체해야 한다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영국과 한국의 사회를 단순 비교해 본다면 한국이 나은 점도 훨씬 많다. 일처리의 신속성, 정확성, 친절함과 성실성 등 한국인 개개인, 그리고 조직원으로서 한국인들의 능력 역시 영국인에게 뒤질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어떠한 제도나 조직, 그리고 사회가 그 체제를 유지하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윤활류로써 그 바탕에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 영국의 수능 취소 소동으로부터 한국사회가 새겨야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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