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견문 정조 임금 시절 지어진 집을 팝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윰윰쾅쾅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4,986회 작성일 18-06-04 04:50본문
"정조 임금 시절 지어진 집을 팝니다! 조선 후기 아름다운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이 유서깊은 집은 지어진지 200년이 넘었습니다. 최근 부엌과 화장실을 새롭게 단장했지만 안방의 온돌과 사랑채의 기와 일부는 당시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 한 부동산 사이트에 위와 같은 매물이 올라왔다고 생각해보자. 이 광고를 본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까?
‘이렇게 오래된 집에 난방은 잘 될까?’, ‘유지나 관리비가 많이 나오진 않을까?’
무엇보다도 사적지나 국가지정 한옥마을이 아닌 곳에서 이렇게 오래된 건물을 찾는게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오래됨과 낡음이 종종 동일시되는 한국에서 이토록 오래된 집들에 웃돈을 지불하며 사는 것은 분명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진1> 필자가 거주하는 지역에 있는 오래된 펍.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0년전인 1606년 운영허가를 받았다. 영국에서 이 정도는 되어야 오래된 건물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상황은 다르다. 영국에서 2,300년된 건물을 찾는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오래된 건물일수록 비싼 경우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위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양식을 갖고 있다거나, 수백년이 된 벽난로를 보유한 집임을 뽐내는 광고 글들이 부동산 사이트에 심심찮게 올라오곤 한다.
새 것을 사랑하는 한국인, 낡은 것 성애자 영국인
부동산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좀 더 부연해보자. 한국의 경우는 신축건물이나 재건축 아파트의 인기가 높다. 때문에 30년만 지나면 멀쩡한 아파트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물론 영국의 경우도 도심에 새롭게 자리잡은 모던한 건물이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하지만, 분명히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한국의 부자들이 강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도심한복판의 ‘최신’ 아파트에 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국의 부자들은 도심에서 한발짝 떨어진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나 바스(Bath)의 일이백년된 집을 선호한다. 유서깊은 건물일수록 프리미엄이 붙는다.
유서깊은 건물이라. 그러나 실상 이런 ‘유서깊은’ 건물들은 편리한 도심 속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수백년된 마룻바닥은 무너질듯 삐걱거리고, 나무문은 너무 닳았고 방음도 잘 되지 않으며 높은 천장의 실내는 보기에는 멋지지만 아침저녁으로 한기를 뿜어낸다.
<사진2> 영화 ‘어바웃타임(about time)’의 한장면. 필자가 영국에 산 이후로는 이 영화를 볼때마다 닳아빠져서 떨어져나갈 법한 찬장이나 가구, 소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저게 바로 영국이지!
영국인들의 이러한 옛것 집착은 비단 주택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국인들이 웬만하면 물건을 버리지 않고 수선해서 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때론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었다면 영화촬영장에서나 볼 법한 올드카가 도로를 누비고 다닌다거나 주말마다 골목골목에서 벼룩시장이 열리는 것은 애교 수준이다. 안전을 생각해서 당장에 폐차해버려야 할 법한 고물 자동차(고물이라는 수식어도 너무 사치스러울 정도인!)들이 도로 한복판에 주차되어 있다거나, 쓰레기와 다름없는 가구들이 중고매매 사이트에 버젓이 올라오는 일들이 너무나도 흔하다.
<사진 3> 깨진 창문과 우그러진 문짝을 테이프로 수선한 (...) 자동차. 재미있어서 필자가 직접 찍은 것인데, 문제는 영국에서 살다보니 이런 차들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낡은 것을 사랑함으로써 비롯되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는 영국인들
상황이 이정도인데도 영국인들은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그러한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낡은 것으로부터 가치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영국 영화를 보면 할머니, 어머니가 쓰던 결혼식 예물이나 웨딩드레스를 딸에게 물려주는 장면을 가끔 보게 된다.
또한 필자는 1940년대 생산된 지프차를 보여주면서 그 속에 담긴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한 영국인 할아버지를 만난적도 있다. 폐차나 다름없었지만, 그 차와 함께한 기억들이 아직까지도 자동차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아울러 필자의 영국인 친구 한명이 한국으로 이사하면서 가져갈 물품에 낡은 커피테이블을 적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다지 특별해보이는 것이 없는 커피테이블을 굳이 비싼 이사비용까지 지불하며 한국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까닭을 묻자 그 테이블이 본인의 할아버지 적부터 사용하던 것이기 때문이란다. 가구에서부터 자동차, 웨딩드레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고 있고, 이러한 사연은 세대를 거치며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버려지지 않은 이러한 사소한 기억들이 모여 많은 한국인들이 그토록 동경하는 영국의 ‘유서깊은 전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한국과 영국을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영국은 2~300년 전부터 부를 쌓아올렸고 현재는 굉장히 천천히 변해가는 국가다. 반면에 우리가 먹고, 입고, 즐기는 것들 중 많은 것은 기껏해야 4,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성공적으로 빨리 바뀌면서 낡은 초가를 새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하고, 오래된 흙담을 고층 아파트로 바꾸는 성공을 자축하던 나라에서 살았다.
또한 오래된 것에 집착하는 영국인들의 성향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불편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해 런던에서 벌어진 그렌펠타워 화재 참사 역시 낡고 오래된 건물 구조가 사건을 키운 원인으로 주목받기도 했고, 바뀌기 싫어하는 영국인들의 성향이 정치-제도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의 이러한 성향은 역시 본받을 부분도 많다. 낡은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서부터 오는 불편을 감내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여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유 속에서 앞서 언급한 영국의 전통과 이야기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유구한 전통을 가졌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박물관에 박제된 전통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전통과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낡은 커피테이블부터 살펴보는게 어떨까.
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리나라는 아파트 30년만 돼도 재건축 못해 안달인데..
제가 영국에 있을 때도 살던 동네 하이스트릿에 300년 된 집에서 화재가 나서 이슈가 됐던 적도..
뀨뀨냥냥님의 댓글
뀨뀨냥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ㅋㅋ공감되네요. 언뜻 보기에는 낭만적이지만 막상 살아보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