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벗어 던진 침팬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양귀비 꽃 - 리멤브런스데이를 지켜보며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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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견문 마스크를 벗어 던진 침팬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양귀비 꽃 - 리멤브런스데이를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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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윰윰쾅쾅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279회 작성일 20-11-1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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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의 오후 6, 그리고 영국의 111111. 

 

재작년 태국 여행 중에 겪은 일이다. 필자는 방콕 도심의 어느 공원을 걷고 있었다. 공원은 호수도 있고 육상 트랙도 있어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고, 조깅을 하고,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는 태국인들도 꽤나 북적거렸다. 그런데, 오후 6시 정각 스피커를 통해 태국 국가가 흘러나오자 마치 거짓말처럼 공원의 모든 태국인들이 국가가 끝날 때까지 하던 일을 멈추어 서서 국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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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주인공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던 도중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싸움을 멈추고
경례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와 
비슷한 일을 태국과 영국에서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 트루먼쇼나 국제시장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일을 영국에서도 경험할 수 있었다. 필자가 재작년 1111, 리멤브런스 데이에 겪은 일이다.

물론 영국 뉴스나 축구경기를 보면서 항상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면 영국인들이 가슴팍에 붉은 꽃 장식물을 달고 다닌다는 것과, 그 꽃은 양귀비 꽃이며 1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이라는 것 정도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추모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영국인들이 100년도 더 지난 전쟁에 대해 추모하는 태도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여느 날처럼 별다른 생각없이 도심을 걷고 있던 2년전 1111. 11시가 되자 갑자기 울리던 추모의 사이렌 앞에 주변을 지나던 모든 영국인들이 2분간 마치 영화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한국에 살면서 현충일이나 민방위 훈련 때 울리던 사이렌 소리에 종종 성가심을 느끼곤 했었는데, 그러한 필자의 과거가 부끄러워질 만큼 브리스톨 도심에 울리던 사이렌 앞에 선 영국인들의 태도는 진지하고 엄숙했다.

 

1차대전 당시 영국에서는 600 명의 남성이 전쟁에 참여했고 사망자는 거의 90만명에 달하며, 부상자를 포함한 사상자는 250만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20 남성의 사망자가 영국의 두배에 달한 프랑스의 상황은 이보다 심각해서 당시 10 후반에서 20대까지의 남성은 아예 지워진 세대(deleted cohort)’ 불렸을 정도이며, 종전이 1,2년만 늦었다면 13 소년들까지 전쟁에 동원해야 했다는 보고서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기억이 뇌리에 남아서인지, 전쟁과 전체주의를 대하는 유럽인들의 태도는 상상 이상으로 엄격하고 진지하다. 코로나 팬데믹 앞에서 개개인들의 자유를 외치며 마스크도 벗어 던지고 살아가는 영국인들은 참 제멋대로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100년이 지난 과거를 마주하며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일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영국인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양귀비꽃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고, 타인과 연대하고 뭉치면서 정신적 초월감을 추구하는 존재로 진화해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와 통합을 위해서 사회는 다양한 상징물을 만들어내고, 다시 이러한 상징물을 매개로 사람들은 통합되고 사회가 고도화되는 사이클이 반복된다. 이러한 상징물은 때때로 십자가나 불상이라는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축구팀 서포터들이 함께 부르는 응원가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 나타나기도 하며 현대에 들어서는 이념과 정당정치로 발현되기도 한다.

앞선 칼럼에서도 누누히 말했듯이 사람들은 개개인으로 존재하는 침팬지이기도 하지만, 종교나 전쟁, 정치와 같은 특정한 외부적 환경 하에서는 하나의 깃발을 중심으로 뭉치는 벌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픈 침팬지들처럼 보이는 영국인들에게 11월에 피어나는 양귀비 꽃은 이들을 벌과 같은 사회적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상징물이다. 이들은 가슴에 단 양귀비 꽃을 보며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이러한 가치를 공유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영국이라는 사회에 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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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브런스 데이(Remembrance day)는 자칫 아노미처럼 보일 수 있는 영국사회를 통합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우리의 현재 역시 과거 누군가의 도전과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독립 50년만에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일궈내고 또 근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자국의 소프트파워가 세계로 뻗어 나가게끔 만드는데 성공한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은 짧은 시간 이렇게 꽤 그럴듯한 나라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지만, 우리 사회를 통합할 양귀비 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11, 영국에서 양귀비 꽃이 갖는 상징성을 보면서, 갈등과 반목에 신음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과거에 대한 감사와 부채의식 없이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진출처: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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