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연방에서 양귀비꽃을 가슴에 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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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경삼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5.♡.17.192) 댓글 0건 조회 270회 작성일 24-10-29 19:21본문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해마다 11월이면 여왕은 물론 온 국민이 양귀비꽃 배지를 가슴에 답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을 ‘영령기념일(Remembrance Day)’로 지정하고 11월 한 달 동안 순국열사들을 추모하기 때문인데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호국보훈의 달과 현충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꽃이 아닌 양귀비꽃 모양을 배지로 만들어 가슴에 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양에서 양귀비꽃의 꽃말은 위안, 망각이고 개양귀비꽃은 속절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개양귀비꽃의 꽃말은 엉뚱하게도 ‘죽어간 병사’입니다. 그들이 항우와 우미인의 전설을 알 리 없다고 해도 화려한 꽃에 붙은 꽃말치고는 스산한 감이 있는데요.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봄, 캐나다군 군의관 존 맥크래(John McCrae) 중령이 플랑드르 전선에 투입됐습니다. 그곳은 연합군과 독일군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서부전선의 최전방이자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그러나 맥크래 중령이 전선에 투입된 지 한 달 만에 친구이자 부하인 알렉시스 헬머 중위가 전사하고 말았고 맥크래 중령은 비통한 심정으로 전우를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플랑드르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라는 시를 썼습니다.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존 맥크래, 〈플랑드르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는 표식이네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지만
저 아래 총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네
우리는 죽은 자, 며칠 전까지 살아 있었고
새벽을 느꼈으며 석양을 보았네
사랑했고 사랑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누워 있네
플랑드르 들판에
우리가 벌였던 적과의 싸움 이어주게
힘이 빠져가는 손으로 그대를 향해 횃불을 던지니
그대 손으로 붙잡고 높이 들기를
만일 그대가 전사한 우리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다면
우리는 편히 잠들지 못하리
여기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이 자란다 해도
존 맥크래가 ‘poppy’라고 썼기 때문에 양귀비꽃으로 번역했지만, 그가 그때 본 것은 양귀비꽃이 아니라 개양귀비꽃이었습니다. 그 개양귀비 꽃밭에 1915년 봄, 존 맥크래는 꽃 같은 전우들의 주검을 묻어야 했습니다. 개양귀비꽃의 미치도록 화려한 선홍빛은 전우를 잃은 비통함과 전투에 대한 투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종전 후에 그가 지은 시는 전쟁의 비극을 담은 대표적인 시가 되어 널리 읽혔습니다. 양귀비꽃은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표지(標識)가 되었고 1921년부터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매년 11월 11일에 개양귀비꽃 모양의 배지를 만들어 달기 시작했지요. 배지 수익금은 참전용사와 가족을 돕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같은 영연방인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함께 터키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감행하다가 무려 8천5백여명의 호주군이 전사한 4월 25일을 ‘안작데이(Anzac Day)1) ’로 기념하는데 이때 개양귀비꽃으로 만든 조화를 헌화합니다.
이처럼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기념 배지가 의도치 않게 외교 갈등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중국을 방문한 것이 하필이면 11월이었습니다. 총리를 비롯한 영국 정부 관계자들이 자기 나라의 전통대로 양귀비꽃 배지를 단 채 중국을 방문했고, 중국 측이 양귀비꽃 배지가 아편전쟁을 연상시켜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전하면서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170여 년 전 자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고 전쟁을 일으켜 종이호랑이로 몰락시켰던 영국인들이 줄줄이 양귀비꽃 배지를 달고 온 것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불쾌했겠지요. 반면 영국은 영국대로 80년 가까이 내려온 숭고한 전통을 거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배지에 그려진 꽃이 아편 성분을 가진 ‘양귀비꽃’이 아니라 ‘개양귀비꽃’이라고 해명했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이름표를 붙인 것도 아니고 어쨌든 생긴 건 비슷하잖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 아티스트 :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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