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가 겪을 뻔한 사기 사건에 대해 공유합니다(불룸스버리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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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도한도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2.♡.170.94) 댓글 6건 조회 3,375회 작성일 21-11-18 09:29본문
안녕하세요, 한인 여러분.
매번 생활정보만 눈팅했지, 이렇게 직접 글을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스스로에게 조금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혹시 저 외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까 우려되어 마음을 가다듬고 제 사기담을 전해볼까 합니다.
최대한 디테일을 살려 여러분에게 전하느라 다소 글이 지리할 텐데, 너그러히 양해해주시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올 9월 초 이주해온 학생입니다.
오늘 겪은 일은 제가 평소에 자주 지나는 Westminster Kingsway College에서 Regent Square Gardens 사이의 길에서 벌어졌습니다.
평소와 같이 별 생각 없이 길을 지나갔는데, 갑자기 벤츠 차량(해치백)을 탄, 50대 초반 금발의 안경을 쓴 남성(본인 피셜 이탈리아인 / 억양은 이탈리아 느낌이긴 했습니다)이 차 안에서 저를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 보니, 자기가 히드로 공항에 가야 하는데 길을 모르겠다, 구글 맵으로 검색해주면 자기가 좀 볼 수 있겠느냐 합니다.
제가 평소에 맹하고 별 의심이 없는 성격이다보니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이고 제 핸드폰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자기 핸드폰으로 구글맵이 안내하는 경로를 다 사진으로 찍더라구요? (일단 여기에서 의심했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는 구글 아이디가 없다고 하는데, 아이폰 사용자인 그 남성은 애플 지도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인터넷이 잘 안 되겠거니 하고 사진을 찍게 하니까, 남성이 대뜸 제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 아내가 부산 사람이라고 뭐 만나서 반갑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연치곤 신기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디자이너라며, 아내와 같은 국적의 사람이 자기를 도와준 게 감사하다고 옷을 주겠다는 겁니다.
저런 명품 브랜드의 옷을 준다고 하니 이때부터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심도 했지만요.
제가 이런 거 받기가 좀 그렇다고 하니, 자기 핸드폰으로 차량 뒷 창이 깨진 사진을 보여주더니 자기 차가 강도를 당해서 지갑을 잃어버렸다, 명품 옷을 가지고 공항에 가면 세금을 내야 할 텐데 그걸 낼 돈이 없으니 어차피 나는 못 가져간다. 그러니 주는 거다 하더라구요.
이런 일이 있나 싶으면서도, 저는 어쨌든 본인 사정이 그렇다고 하고 뜻밖의 횡재로 옷을 받을 생각에 내심 들떴지요.
그래서 이렇게 귀인을 만나고 끝인 건가 싶었는데, 이 남자가 슬슬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라포를 형성한 뒤니까요.
배경 설명이 길었으니, 어떤 수법인지 하나하나 짚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기는 돈이 매우매우 많다. 이 점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온라인 뱅크의 잔액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2) 자기 아들이 있는데, 아들에게 선물로 게임하기 상대적으로 어려운 맥북을 사주고 싶다.
(맥북이 얼마냐, 검색해달라고 해서 검색해보니, 2000파운드쯤 되더군요.)
3) 내가 네게 말한 것처럼 차량 강도를 당해서, 카드도 다 취소한 상태다. 그런데 인터넷 뱅킹이 될 텐데 영업일 하루가 걸린다. 내가 네게 돈을 보내줄 테니, 네가 현금을 가지고 있다면 그거를 내게 줄 수 있겠냐? 그 현금으로 내가 맥북을 사려고 한다.
(이 사내는 2시간 뒤에 비행기를 탄다고 했으니, 맥북은 이탈리아에 가서 사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파운드 현금을...? 이미 사기였던 거죠)
4) 불행하게도(다행이게도) 제게는 돈이 없었고... 그래서 카드에 저렇게 큰 돈이 없다고 하자, 현금은 얼마 있냐, 너희 플랫에 가서 가져오자 이렇게 말합니다.
(2시간 뒤에 비행이 있다는 사람이... 사실 말도 안 되는 걸 여기서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옷과 한국인 아내에 눈이 멀었습니다.)
5) 불행하게도(다행이게도) 플랫에도 돈은 없었습니다. 이 남자를 정말 믿은 저는 가족에게 연락을 했고, 저희 누나는 제 얘기를 듣더니 그거는 사기 같다고 하더군요. 저도 위에서 나열한, 저 남자의 디테일이 지닌 허술함을 따져보니 말이 안된다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6) 그래서 그 남자가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디자이너라고 했으니, 제가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구글에 검색해보고 누나를 안심시키겠다구요.
7) cesare paciotti라고 하더군요. 구글에 검색해보니, 위키백과에도 있을 만큼 실존하는 유명 신발 디자이너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외모는... 실제 디자이너분은 검정 눈썹에 키가 170 안팎이고, 나이가 60대 후반인 분에 아내도 이태리 분이신데, 위에서 설명한 저 남자의 인상착의와 가족 관계와는 아예 딴 판인 사람이었죠.
8) 사기임을 확신한 저는, 나는 신용 카드 같은 게 없고 저희 누나가 완강하게 나와서 도와줄 수 없겠다. 부디 잘 가길 바란다. 하고 잘 가라고 했습니다.
상황 끝... 그 남자와 인사를 하고, 한 10분이 지나 생각해보니 모든 게 아귀가 하나도 맞지 않더군요. 제가 돈이 없었기에 이 사기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면서도 다행이다 싶었고, 오늘 하루 종일 다소 우울한 심정으로 제가 당한 일에 분노도 해보고, 타지에서 선의와 호의로만 다른 사람을 대해서는 위험할 수 있겠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런던에 계신 한인 여러분. 저보다 예지적인 능력이 뛰어나신 대다수의 분들께, 이런 바보 같은 사기극에 말려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부디 그러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다만, 위와 같은 사기를 뻔뻔하게 칠 정도라면, 저 사기꾼이 한두 번 위와 같은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는 의미겠지요. 아마 그가 세워 둔 플롯을 매번 반복하는 식일 겁니다.
그러니 위와 같은 이야기를 혹시 듣는다면, 저런 수법과 비슷한 상황에 빠져든다면, 반드시 그 장소를 벗어나 안전한 곳을 향하세요.
다들 안전한 유학 / 이민 생활 되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 줄 요약
1) 길을 물어보는 식으로 일단 접근한다.
2) 사기꾼의 수법은 공짜 옷 & 한국인 인맥 과시
3) 벤츠 해치백을 탄, 50대 초반 금색 머리, 안경을 쓰고 이태리 억양을 쓰는 남자를 필히 조심하자.
댓글목록
roomshare님의 댓글
roomshar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77.♡.185.134) 작성일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이런 일을 당하는 경우도 있을수 있겠네요
펄리님의 댓글
펄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13.♡.124.4) 작성일글 공유 감사합니다.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자신있게 사기를 치는건 역시 백인. 백인들이 동양인들이 자기들에게 호의적이라는 걸 이용하는 사람 많습니다. 어느 인종이든 조심해야하지만 제발 백인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신 분들 조심하세요
감자100님의 댓글
감자1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94.♡.15.151) 작성일공유 감사합니다. 예전부터 별 희안한 머리굴리는 사기들이 많아서 조심하셔야 합니다. 길가다가 불러도 그냥 가는게 최선입니다. ATM에서 돈뽑고 있는데 땅바닥에 지폐하나 던저놓고 네돈 떨어졌다 하고 그사이에 카드빼서 사라지는 것부터, 길거리에서 노트북 보여주고 지금 지갑도난당해서 난감한데 자기노트북 보관하고 돈좀 빌려줘하면서 돈 찾아서 주니 그 노트북은 속빈껍데기 가짜. 등등 상상초월한 사기들이 난무합니다. 그리고 마약밀매상 놈들도 있는데 이건 딴분이 알려주세요.
모드님의 댓글
모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81.♡.155.117) 작성일동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도 비슷한 사람 며칠전에 만남. 워터루 역에서 걸어가는데 한 50대로 보이는 백인인데 딱 보면 머리도 약간 긴게 이태리 남자로 보이기는 했음. 아무튼 자기가 히스로 공항을 가야 하는데 길을 모르겠다고 알려 줄 수 있냐고... 그러면서 종이를 펼쳤는데 잠깐 사이 본게 엔터프라이즈 렌터카 종이였음. 아마 워터루 역에서 차를 렌트한 것 같음. 아무튼 워터루역에서 차를 운전 하는 놈이 히스로 공항 가는 길을 모른다는게 말이 안 되서 걍 무시했음.
영국가디언님의 댓글
영국가디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94.♡.46.186) 작성일
다치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지난 20여년간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사회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내'라고 불리우는 곳에선 반듯하게 걷고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 쇼핑, 구경 등등 ) 듯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쁜 사람들은 여럿이서 다닙니다.
작은 골목이나 조금 호젓한 곳에선 빠르게 지나가시고, 뭘 구걸하거나 묻는 사람들도 지나치시는 것이 좋습니다.
laisla님의 댓글
laisl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82.♡.83.206) 작성일감사합니다 무서운 곳인줄은 알았지만…친절을 이용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