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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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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Dave0723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0.♡.64.141) 댓글 3건 조회 76회 작성일 26-01-2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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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비행으로 지쳐서 런던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도쿄에서 런던까지 대충 12시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착륙을 못 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혼잡한 공항이라 착륙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비행기가 런던 상공을 계속 선회했다. 한 시간 이상 하늘에서 대기했던 것 같다. 하늘에 오래 있었더니 중력의 영향으로 피가 아래로 몰려 발이 퉁퉁 부어있었다. 신발에 발이 안 들어가 신발 끈을 풀고 대충 신었다. 착륙 후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나리타 공항에서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서둘렀다. 거의 뛰듯이 걸었다. 주변에 나처럼 걷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대기 줄은 하나인데 입국 심사대는 15개 정도 됐었다. 줄이 잘 빠졌다. 옛날 입국 심사대는 지금과는 다르게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었다.

 

한 무리의 한국인이 심사대로 향했다. 엄마로 보이는 분과 아이들로 보이는 4명이 함께 갔다. 문제가 생겼다. 대화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40대로 보이는 여성 심사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 줄을 향해 영어 할 줄 아는 한국인 있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손을 들었다.

 

“what is the purpose of your visit?” 심사관이 하는 모든 말을 통역하기 시작했다. 그 아주머니는 한국말로 하셔도 되는데 굳이 영어로 말했다. “I will work” 뒷골이 땡긴다는 표현을 이때 체험했다. 나는 아주머니께 재빨리 말했다. “아주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한국말로 하세요.” 심사관이 투명 아크릴 벽을 두드리며 입국 심사를 방해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숨이 나왔다.

 

“What does your husband do, and what will you be doing while you are here?“ 이 아주머니 고집이 상당했다. 한국말로 하시라고 조금 전 말했는데 굳이 또 영어를 하셨다. ”My husband is dead.“ 굉장히 직설적인 표현으로 영미권에서는 잘 안 쓰는 표현이다.

 

”I can do anything.“ 계획성 없는 추상적인 답변으로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든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입국 심사 시에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영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시면서 굳이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영국 오기 전 스스로 할 말을 만들어 오신 것 같다.

 

“May I ask how your husband passed away?” 아주머니 답변이 못 미더웠는지 심사관이 물었다. 통역을 들은 아주머니는 대답을 망설이셨다. 아이들을 슬쩍 보시더니, 나에게 보라고 손가락으로 심사대 위 좁은 공간에 두 글자를 쓰셨다. 나는 심사관에게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단어 하나를 말했다. “I’m very sorry to hear that.” 심사관이 한숨을 내쉬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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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막으려고 정부차원에서 노력을 많이 했다.>

그 당시 한국은 IMF 여파로 자살률이 급등했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지자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힘들게 살던 사람들이 외국 나간다고 여유로워지지는 않았다. 서로 돕고 살아도 부족한 판에 사기 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If these children were repatriated to Korea, would there be adequate protection for their rights and welfare?” 통역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견을 묻는 것 같았다. 입국 심사에서 아동 인권을 질문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잠깐 망설였다. “Although child protection laws do exist in Korea, they are not yet effectively enforced. It will take considerable time for these laws to become fully effective in protecting children.”

 

한국은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비준했지만, 그게 단순히 비준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전문인력 양성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했는데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도 않거니와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그 당시 한국은 개도국이었다. 애들이 말 안 들으면 먼지 나게 패던 시절인데 무슨 아동 인권을 입에 담겠는가?


한국이 OECD에 가입한 해는 96년으로 IMF 터지기 한해 전이었다. IMF 이후 재정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부채를 덜기 위해 공기업들을 줄줄이 매각하고 있었고, 경제 회복에 중점을 두고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던 시기라 아동 인권 보호는 법은 갖추고 있어도 실효성이 전혀 없었다.

 

심사관이 한국의 상황을 모르니 내 답변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한국은 전쟁 이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경제가 급성장하고 OECD에도 가입했지만 사회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경제 성장에만 몰두했던 결과였다. 99년에 45개 민간단체와 정부가 손을 잡고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을 겨우 만들었는데 아동 인권 타령은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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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수표가 조금 더 컬러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Do you have enough money to support yourself during your stay?”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여행자 수표와 현금을 합쳐 6천 파운드 정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Is that all the money you’re carrying?” 아주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심사관이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즉시 입국 거부할 줄 알았는데 어쩌면 입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Where do you plan to stay?”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미처 준비를 못 하셨는지 나에게 방을 하나 빌렸다고 말해주었다. “Do you have an address where you’ll be staying?” 지갑 속에서 주소가 적힌 작은 메모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뉴몰든이었다. 거기에는 방을 빌려주는 사람 이름과 연락처도 있었다. 심사관이 그것들을 옮겨적었다. 입국을 허가해 줄 것 같았다.

 

여권에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도장을 여러 번 찍었는데 여권 하나당 각기 다른 도장 2~3개를 함께 찍었다. 여권을 모두 돌려주며 말했다. “A child welfare officer will contact you shortly and visit your home.” 내가 마지막으로 통역을 마치자 환영 인사를 건네고 들여보내 주었다. “Welcome to the UK.”

 

이게 되네??? 이게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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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22.♡.24.134) 작성일

여행자수표 하니까 Thomas Cook 생각나서 아직도 있나 찾아보니까 2019년에 파산했군요.
브랜드 사용권만 중국에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가져갔던 American Express 여행자수표는 화려하지 않고 단색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ㅎㅎ

soleil님의 댓글

no_profile soleil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45.♡.235.175) 작성일

그 막막하던 때, Dave0723님이 베풀어 준 선의는, 그 아주머니에게는 무너지려 할 때 생각나는 힘이 됐을 것 같아요.
97년도 12월은 진짜 충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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