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진짜안와의 짧게 때리는 소설 시리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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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5번진짜안와 이름으로 검색 (220.♡.249.213) 댓글 0건 조회 2,391회 작성일 10-10-03 12:46본문
언어유희
런던에 살게 된 지 1년 만에 대학 동창이었던 여자애가 어학연수를 한다며 런던에 왔다.
나름대로 대학 때는 첫사랑이기도 했던 그녀. 나는 매너리즘에 빠져가던 영국생활이 반등되는 기분을 느낄 만큼 몹시 반가웠다.
우리는 대학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언어유희’라는 말도 안 되는 저질 도발로 언어를 조롱하고 킬킬거리는 것을
종말을 향해가는 세계의 혼선에 대한 모던한 로망이라고 생각했다.
- 학교 앞 가고파란 술집 정말 안 가고파.
- 어제 또 포천 막걸리에서 막걸리 먹고 맛 갔잖아.
선배들에게 걸리면 썰렁하고 유치하다며 혼났지만
동아리방에서 마주칠 때마다 우리끼리는 거의 언어유희 배틀을 뜨는 식으로 그렇게 노는 사이였다.
당연히 우리는 동아리 내에서도 외계인으로 분류되어 따가 되었지만
당연히 사귀게 되었다.
날씨도 흐린데 우리 사귈까 라고 하자 그럴까. 라고 말하며 그녀와 나는 농담처럼 연하게 캠퍼스커플이 되었다.
동창들이 ‘대패 삼겹살 커플’이라고 우리의 유치한 연애를 조롱했지만
나는 연애가 또 진지할 건 뭐냐 라고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았을 만큼 사랑에 대해 잘 몰랐다.
그때 우린 정말 싸구려 대패 삼겹살을 많이 먹었다. 전기톱 삼겹살, 펜치 삼겹살, 드릴 삼겹살, 같은 것도 있겠지 식의 유치한 농담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졸업을 하게 되자 사귀기 시작했을 때처럼 우리는 연하게 헤어졌다.
우리의 놀이터였던 동아리방이나 장난감이었던 언어들이 졸업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뭐, 당장 먹고 살아야 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유희를 그만 둬야 했다.
게다가 졸업하자 너무 바빠졌고 얼굴을 볼 기회나 찬스도 없다보니 연락도 뜸해지고 전화번호 바뀌고 하는 수순을 밟아
딴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정말 가볍게 연애해서 싸운 적도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터무니없이 진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계가 무겁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간단히 그녀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어설픈 언어유희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 지경이 되도록 우리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도 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라고 생각해 서 나 역시 시들해졌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대학 시절은 정말 재미있는 추억이었고 나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5년이 훌쩍 지나서 문득 그녀에게서 이메일이 온 것이다. 결코 삼메일이 온 게 아니었다.
- 영국사랑 카페에 18번진짜욕같애 라는 아이디로 글 쓰는 사람 너 맞지? 글 읽어보니까 세상에서 제일 유치한 게 딱 너라고 생각했어.
헉, 그때 나는 그녀가 너무나도 반가워서 토튼햄에 있는 인터넷 카페에서 점프를 해대며 좋아했다.
소식이 닿은 그녀와 나는 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녀가 영국에 나오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정보를 얻으려고 영국사랑 카페에 가입했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 넌 왜 영국에 있는 거니?
- 미역국에 있는 것보단 낫잖아.
- 너 참 안 변한다. 올림픽도 유치할 수 있겠어.
- 그게 내 매력이지.
그녀는 영국에 올 수 있는 현실적인 정보들을 물어왔고 당연히 나는 친절하고 상세하게 한마디로 가르쳐줬다.
- 영국사랑 카페만 보면 돼. (ppl 이네……)
- 그럴 줄 알고 다 봤어.
- 좋아. 그럼 오는 일만 남았군.
히드로 공항에 내린 그녀는 예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았고 시간이 조금 흘렀을 뿐,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녀가 살 집을 알아봐 주었고 그녀가 왔을 때 공항에 데리러 나갔고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으며 은행 여는 걸 도왔다.
기존 생활에 그녀를 챙기는 생활까지 해서 많이 바빠졌지만 상관없었다. 다만 너무 바빠 처음엔 통 언어유희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낸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야, 이제 조금 영국에 자리를 깐 거 같아.’ 라고 선언한 그녀는 여유를 되찾고 슬슬 나와 예전처럼 언어유희를 시작했다.
- 너 어디 산다 그랬지?
- 웨스트페리.
- 그게 어디야?
- 카나리 와프 근처야.
- 아아 거기 빌딩 많은 까나리 액젓 있는데?
- 시작인 거냐?
그랬다. 시작이었다. 우리는 파트타임을 쉬는 주말을 이용해서 함께 런던 관광에 나서곤 했다.
- 여기가 그 유명한 센 폴 St Paul 성당이야.
- 그럼 약한 폴 성당은 어디?
그랬다. 우리의 유치함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언어유희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말 하면서 절대 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상한 말을해야 유머가 발생한다.
평소보다 더욱 진지해야 한다. 그녀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애절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녀와 열심히 농담을 했다.
- 다음 주말엔 여기 센터 포인트 앞에서 만나자.
- 잉? 센트레 Centre 라고 되어 있잖아. 글자도 못 읽니?
- 그럼 colour는 컬아워냐.
- 안 웃기려면 이스트 햄 가서 햄이나 볶아.
- 오 저것 봐라 위윌 퍽큐다.
그녀와 나의 장난은 나날이 심해져 Keep Touch! 라고 말하며 헤어지고 손바닥으로 계속 터치하고 있는 흉내를 내는 등,
저질 언어유희 궁극의 런던대공황으로 떨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 테이트 모던에서 데이트 모던 안 할래?
- 오잉? 무슨 일 있어?
-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 한때는 해가 지지 않았던 나라에서 헤어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 아무래도 내가 영국에서 바람을 피운다고 믿고 있나봐.
- 그럴 수가. 우린 담배 밖에 안 피웠는데.
- 잘 됐어. 오해 받느니 정말 사귀어 버리면 되지.
- 오 나는 일단 땡큐지만, 그런 건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어.
- 탑다리에서 5시 어때?
- 지겨워 탑다리. 피카다리 곡마단(Piccadilly Circus)어때? 뮤지컬도 보게.
- 옥 (Ok)
그래서 우리는 그날 시원하게 우리식 표현대로 '뮤지컬 니미제라블' 한 편 때리고
감동 먹고 분위기 잡고 거리를 걷다가 프러포즈 상태가 되었다. 이번엔 그녀가 했다.
- 런던 날씨도 흐린데 우리 사귈까?
이런 얘기를 농담이 아니도록 하려면 웃고 있어야 한다. 표정을 보았다.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 좋아.
그 뒤로 샤프트베리 천사상 앞에서 10초 동안 뽀뽀하고 저질 바퀴벌레 런던테러 같은 언어유희 테러커플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말장난이었다.
- 야, 세인즈! 버려.
- 아고~스~ 집 열쇠를 두고 나왔네
- 오 할리팍스다. 팩스 좀 보내고 올게.
- 비틀즈의 고향 강풀liverpool에 꼭 가보고 싶어.
- 그건 좀 심하잖아. Riverpool도 아니고.
- 앗, 아스다!
- 오 아스 어디?
- 일하는 데서 좀 억압당했어.
- 그래? 그럼 리버티 백화점 가자.
- 비자 얼마나 남았지? 연장해 달라고 빌자.
- 먹고 죽으려고 해도 얼마 안 남았어.
- 그럼 내일은 우리 하이드 파크에서 숨바꼭질 할까?
- 근데 지킬 파크는 왜 없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야 이 색히들 가뜩이나 우울한 런던 날씨에 정신줄 놓고 미쳐 날뛰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겠지만
우리들은 그러면서 6개월 가까이 정말 행복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공부하고 고생하면서 연애 하느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웃기는 일이 될 것 같았지만
그렇다. 그 당시엔 웃기는 것. 그 유희가 필요할 뿐이었다. 인생 뭐 별 것 있나. 좋게 살아내면 되는 거지.
우리에게 이 마냥 낯선 나라는 커다란 동아리방 같은 곳일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 경험한 이야기가 그렇듯 또 끝이 왔다.
비가 막 쏟아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날씨였다.
- 코 베이지 않게 조심해.
라는 농담을 하며 걷다가 우리는 코벤트 가든의 어느 마임 아티스트 앞에 서 있었다.
처음엔 저것 봐, 임마 아티스트다, 라고 농담을 하며 지켜보았지만 우린 곧 진지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온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마침 비가 내렸고 그의 분장이 지워져 내렸지만 그는 퍼포먼스를 멈추지 않았다.
비와, 어쩐지 슬펐던 그의 동작들은 눈물 같은 인생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감명 깊게 보고만 우리는 착잡해졌다.
커피를 마시러 가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말로 웃기는 세계의 공허함, 같은 게 마시던 에스프레소에 쓰디쓰게 녹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피가게에서 일어서며 그녀는 비자를 더 이상 연장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비가 제법 많이 왔다.
며칠 뒤 그녀는 한국에 갔고, 나는 히드로 공항에 주저앉아 혼자 울었다.
나는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뒤 영국 생활이 정리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인천 공항에서 혼자 울었다.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우리의 휘발되기 쉬웠던 저질 언어유희처럼 우리가 사랑했던 런던에서의 시간도 잠깐의 언어유희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유희왕 시리즈를 보며 조용히 30대를 맞이해야 했다.
-끝
시간통조림 | 흠.. 3탄을 기다리며. |
15번진짜안와 | 오 정말 오랜만 하이^^ |
God bless u | 아...진짜 소설같아요...이거 다 실제 있었던 일인거죠??너무 재밌어요... |
15번진짜안와 | 78% 픽션입니다. ㄷㄷ |
thinkaboutyou |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련하게 슬퍼지네요 다 읽고나니. |
런던 여름 | 이분이 15번님의 전성기 시절 함께 살아주셨던 그 여친분이신가요? |
런던 여름 | 님의 글 속에 등장했던 그 전설속의 여주인공님이셨다는...? |
15번진짜안와 | 어느 여자 말씀인지... 워낙 여자가 많아서....;;; (아픔은 가능한 낼름 잊는 게 장땡인듯) 더구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에요.^^ (다음 소설은 여름님을 위한 달래기 픽션, 대충 짜 놨어여.ㅎ) |
런던 여름 | 15번님 글속에서 사랑하는 그녀로 등장한 여주인공은 한분뿐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저를 위한 달래기 픽션은 하지 마셔요...제가 너무 아프거든요.. 마음은 감사.. |
런던 여름 | 그런데 언어유희의 정통이 빠졌군요... 에잇 정떨어져...응? 줏어... 흠..죄송.. |
맹가이버 | 개그 완전 제스타일인데여. 웃어도 되죠? 사실은 막 눈물 흘리며 웃었어요.ㅜ_ㅜ 위윌퍽큐에서 빵.ㅋㅋㅋㅋ |
katestyle | 오 진짜 재밌어요 ㅋㅋㅋㅋ대박이다진짜 |
엘리자베스같이 | 나 비자 연장 못해...> 영국 커플들 갈라놓는 말들의 80%는 되지 않을까 싶군요..에그. |
JJICJJA | PPL 감사합니다. ^^; |
이러구이따 | 영국사랑에서의 진정한 글쟁이?님이 아니신가 싶네요... 연애에서는 유치+찬란이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일들이죠..^^;; 너무 잘 봤습니다..3탄 기대할께요..^^ |
니퍼 | 코 베이지 않게 조심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바이올렛] | 진정 잼나요~ㅋㅋ 정기적으로 글 보고싶어졌어요!ㅋ |
댕구댕구 | 헉!! 완전 최고 |
nostalgia & new | 잼있는 글이지만....... 아련한 느낌이 오네요. ㅠ.ㅠ . .. |
새우92 | 님좀짱인듯ㅠ |
Golders Green | 다시 님의 글을 보게 되 너무 반갑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축하,,, 축하할 일이 생겼다죠! 행복하세요. |
92CU | ㅎㅎㅎㅎ 긴 글 저 잘 안 읽는데... 다 읽었는네요.. ㅎㅎ 언어 유희... 한때의 제가 생각나네요.. %^% |
onlyformomo | ㅋㅋㅋ 정말 잼있게 읽었습니다. ㅋㅋㅋ 언어유희 정말 재미나군요...ㅋㅋㅋ |
가을안개 | 와~ 예전에 "15번 진짜 안와"님 글 무지 인상깊게 읽곤 했었는데.. 다시 또 접할수 있는 기회가 와서 얼마나 기쁜지...^^ 변함없이 훌륭한 글솜씨에 그저 감탄하고 갑니다...영사에 또 기대꺼리 하나가 생겨 좋네요~ㅎㅎ |
Jina CHOI | 와....^^ 너무 재미있다..ㅎㅎㅎ |
alth | 결코 삼메일이 온 게 아니었다 |
양배추 | 유희왕을 읽으면서..흠 왠지 슬픈 결말? 인데요 ㅎㅎ |
break |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글쓰시네요 ㅎㅎ 재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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