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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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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Dave0723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0.♡.64.141) 댓글 0건 조회 33회 작성일 26-03-0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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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일찍 신부님 전화 받고 나왔다. 신부님은 골프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셨다. 사목 안 하시냐고 물으니 유럽에서의 사목을 완료하고 새로운 소임지 발령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동안 골프나 즐기다 가시려는 듯 매일 같이 골프 연습장에 오셨다. 골프 가르쳐 드리는데 문득 통역 알바를 맡겨주셨다. 한국에서 지인분이 오셨는데 투자 이민 상담을 받으려고 하신단다, 월요일에 만나서 변호사 통역을 해달라고 하셨다. 그분이 신부님께 통역을 부탁하셨는데, 돈 받고 도와준다는 게 신부님 입장에서 조금 거북하셨던 모양이다. 유학생 용돈이나 벌게 해주고자 나에게 맡기셨다.


신부님과 점심 먹고 헤어졌는데, 사기꾼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사기 칠 결심을 한 모양이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잠깐 자기 사무실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인간 대마초 냄새 때문에 좋은 감정이 없었는데 딱히 거절할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찾아갔다. 그 시절에 뉴몰든 하이스트릿에는 유학원이 많았다. 대부분 건물 2층에 조그맣게 차린 사무실이라 고개를 들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알려준 곳으로 찾아갔더니 3평 정도 되는 작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에게 신문 하나를 건네며 기사 하나를 읽어 보라는데 탐탁지 않았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시절에 한인 신문은 대부분 다음 뉴스에서 복사하기 붙여넣기로 신문을 만들고, 한인 업체 광고를 실어 수익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낮았다. 한두 개씩 칼럼이나 현지 이슈를 다루는 기사를 직접 작성해 게재하기도 했는데, 나에게 그것을 읽어 보라고 건넨 것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뉴몰든 한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한인 신문에 실려있는 광고주 모두에게 전화를 돌리셨다. 워크퍼밋 안 파냐고... 자신이 일하는 가게 전화기로 전화를 거니까 받는 사람 전화기에 발신자 표시가 뜨면서 주인공이 밝혀졌다. 그렇게 기자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중국 국적자는 한국인처럼 영국에 쉽게 올 수가 없었다. 무비자 협정이 맺어져 있지 않았다. 빚내서 온다는데, 영국 오는데 왜 빚을 내야 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영국에 와서 몇 달 일하면 다 갚을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이다. 일하는 식당에서 워크퍼밋 내달라고 하시지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 결론은 그 기사에 워크퍼밋 매매가를 5만 파운드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콧방귀가 나왔다. 내가 신문을 내려놓자 그 인간이 들뜬 표정으로 약을 팔기 시작했다.


다 읽었어? 여기 보면 알겠지만 워크퍼밋 시세가 5만 파운드거든? 네가 원하면 내가 특별히 35천 파운드에 줄게, 어때?”


내가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적으로 대할지, 이성적으로 대할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지 고민했다. 내가 이런 인간한테 감정을 소모한다는 것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걸려들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에게 또 사기 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런 헛소리에 걸려들 사람이 있겠냐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들은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세가 5만 파운드다? 조선족에게 5만 파운드가 있다는 말을 일단 못 믿겠어요, 백번 천번 양보해서 있다고 쳐요, 그 돈 있으면 연변에서 가게 열지 남한테 왜 줘요? 아니면 5만 파운드로 뉴몰든에서 가게를 차리고 사업 비자 신청하면 될 텐데 남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5만 파운드로 워크퍼밋을 산다고요? 그 돈 벌려고 왔을 텐데 그 돈을 남에게 준다고요? 워크퍼밋 사려고? 식당에서 월 800파운드도 못 받잖아요? 5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5만 파운드가 안 되는데, 수년간 힘들게 번 돈으로 워크퍼밋을 산다고요? 그걸 지금 믿으시는 거예요? 5만 위안이라고 하면 믿을지도 모르겠어요.”

 

굳이 내가 신문기사의 신빙성에 대해 지적하지 않아도, 이 정도는 상식선에서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본인이 뉴몰든에서 살고 있다면, 장사해본 사람이라면 최저 시급이 얼마고, 그렇게 일해서 5만 파운드를 못 모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워크퍼밋은 홈오피스에서 내주는 것이지 형님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가게 압류당했죠? 유학원은 매출 없죠? 워크퍼밋이 나오겠어요?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워크퍼밋이 필요하면 취업하면 되는 거잖아요? 제가 돈 주고 그걸 왜 사요? 제가 언제 워크퍼밋 필요하다고 한 적 있어요? 제가 LSE 석사과정 들어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건데요? 저한테 돈 받아서 가게 압류 풀려고 그러신 거예요?”

 

그 인간 얼굴이 붉어지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이거 내가 실수했네, 어쩐지 나도 5만 파운드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어...정말 미안하다. 나쁜 의도는 없었어. 나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정말...”

 

한마디 더 하려다 참았다. 본인 스스로 망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저걸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압류 풀겠다고 부모, 형제, 친구들한테까지 돈 빌리면 희망이 생길까? 장사 안돼서 대출금 못 갚아 압류당했는데, 압류 푼다고 장사가 되겠나? 폐업하고 가게 정리 후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지 사업비자 유지하고 싶어서 저러고 있는 것 아닌가?

 

그날 밤 거실에서 술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 순간 술상 엎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듯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는 순간 그 인간이 고함과 함께 만삭의 자기 와이프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었다. ‘저게 미쳤나?’ 일어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 인간이 일어서서 바닥에 쓰러진 자기 와이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날 슬쩍 보더니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울고 있는 임산부와 그 옆에서 더 크게 울고 있는 아기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고민했다. 조용히 다가가 임산부를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작은 방 침대에 내려놓고 다시 거실로 와 아기를 안았다. 아기를 엄마 옆에 내려놓고 내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사람이 불편하면 함께 있을 수 없다. 나는 남이니까 이렇게 떠나면 그만이지만 애 엄마는 어떡하나? 이혼하면 배 속에 아이는? 어쩌다 저런 찐따 같은 놈을 만나서 고생인가?

 

이걸로 액땜했으면 좋겠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시절의 뉴몰든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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