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일기(22)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민박집 아주머니 나이가 30대 후반, 아저씨가 40대 중반으로 보였다. 동생 부부는 20대 후반, 30대 초반 같았다. 언니와 다르게 동생 부부는 입국할 때 어학원 학생 비자로 입국했다. 내가 그 집에 갔을 때 학생 비자가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비자 연장을 위해 학교 재등록이 필요했다. 문제는 돈이 없었다. 언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빌려주지 않았다.
사실 돈 없어도 스쿨레터는 받을 수 있는데, 영어 공부도 안 할 거면서 왜 굳이 학교 등록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언니 부부는 관광비자로 들어와 일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은 비자 연장한다고 돈 빌려달라는 말이 나오나? 아주머니께 들었는데, 제부라는 놈은 1년 동안 어학원 다니면서 영어 한마디도 못 하고, 알바도 안 하고 있었다. 곧 애 아빠가 될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어서 아주머니가 싫어하셨다. 아주머니가 내어준 방 한 칸도 사실 돈이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줬으면 언니로서 할 만큼 한 거다.
아주머니 부부는 입국한 지 1년이 넘어 불법체류자였다. 불체자여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계셨다. 민박집이다 보니 손님을 받기 위해 한 사람은 항상 집에 있어야 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오전 오후 번갈아 가며 일하고 계셨는데, 아저씨가 먼저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셨다. 한인 물류회사에서 지게차를 운전한다고 하셨는데, 점심때 돌아오셨다. 아저씨가 돌아오시면 아주머니가 식당에 알바 하러 나가셨다. 그렇게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투잡 뛰고 계셨다.
그날이 아마 수요일이었을 것이다. 오전에 내가 집에 있었다. 통역 알바도 끝나고, 집도 구했겠다. 할 일이 없었다. 침대에 기대 노트북으로 런던 근교에 있는 비행 클럽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목조 계단을 삐걱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수상쩍은 게 최대한 소리 안 나게 하려고 살며시 밟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오전에 투숙객들 모두 떠나고, 아주머니는 여동생과 장 보러 마트에 갔다. 제부라는 놈은 학교 가고 없을 시간이지만, 내 느낌에는 그 제부라는 놈이 집에 있었다.
진짜 도둑이라면, 돈 되는 가전제품이 1층에 다 있는데 그것부터 털어야 하는 것이 맞다. 1층 주방 옆에 여동생 부부의 방도 있었는데, 진짜 도둑이라면 거기부터 터는 것이 순서 아닌가? 목조 건물이라 계단 밟는 소리, 방문 여닫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 1.5층에 있는 게스트룸을 안 열어보고 곧장 2층으로 올라왔다면 2층 방에 목적이 있어서다. 2층에는 내 방과 아주머니 부부의 방, 두 개뿐이었다. 내 방문에 귀를 갖다 대는 듯 ‘스~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방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집에 사는 사람뿐이다.
방이 좁아 일어나기 귀찮았다. 베개를 집어 문에 던졌다. 꺼지라는 뜻이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사람 있다는 것을 알려줄 요량으로 노트북에 셀린 디옹 시디를 넣고 틀었다. 틀지 말걸, 그냥 일어설 걸 나중에 후회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튼 음악 소리가 범행 소리를 감춰주었다. 아니 내 귀를 스스로 막은 꼴이었다. 음악 소리 때문에 밖의 소리가 안 들렸다.
한 30분쯤 흐른 뒤에 계단을 쿵쿵거리며 뛰어 올라오는 울림이 느껴졌다. 음악을 껐다. 아주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아주머니가 말씀해 주셨는데, 아침에 학교 간다고 나갔던 제부가 아직 돌아올 시간도 아닌데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단다.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내 방문을 두드리셨다. 일어나기 귀찮아 네 라고 대답하니 잠깐만 나와달라고 하셨다. 한숨을 쉬며 억지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학생, 혹시 방에 계속 있었어?”
“네.”
“집에 학생 말고 누구 없었어?”
“아주머니 제부가 집에 있을걸요? 아까 고양이 걸음으로 올라오던데요?”
“직접 봤어?”
“아뇨, 제 방문에 귀를 갖다 대던데요? 이방에 사람 있다는 거 아는 사람은 여기 가족뿐인데, 아저씨 일 나가시고, 아주머니는 여동생분하고 마트 가시고, 그 제부라는 사람뿐이잖아요?”
“학생, 미안한데 경찰 좀 불러줘. 돈이 없어졌어...”
경찰을 부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내려와 보니 여동생과 제부라는 놈이 같이 앉아 있었다. 내가 그놈을 쳐다보니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 부부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아저씨는 과묵한 분이셔서 집에서 말을 거의 안 하시는 분이다. 아주머니는 입이 좀 가벼운 편이셨다. 조잘조잘 말이 많아서 나도 피했다. 돈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말하고 다닐 사람은 아주머니뿐이었다. 아무리 말이 많아도 제부한테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여동생한테 말했을 것이다. 여동생이 주범일 확률 20000%다.
만삭의 몸으로 언니한테 마트 가자고 할 때 계획은 시작됐다. 대형 마트는 뉴몰든 하이스트리트에 있었는데 집에서 멀었다. 투숙객들 모두 나갔는데, 내가 나가지 않은 것이 변수였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음악을 트는 바람에 순조롭게 범행이 성공했다. 지능 부족으로 완전 범죄에는 실패했지만...
곧 있어 아저씨도 오셨고, 바로 뒤에 경찰도 왔다. 이 집 구성원은 다 모였다. 여경과 남경 두 명이 왔다. 사건 경위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 여동생이 먼저 나섰다. 이 집에 나 혼자 있었는데 돈이 없어졌다는 소릴 되지도 않는 영어로 지껄였다. 민박집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영어 못하니까 내가 영어 못할 줄 알았나 보다.
경찰이 그 여자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가려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나도 기분 더러웠다. 그 여자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IELTS 9.0의 원어민급 영어를 들려줬다. 경찰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집안을 살펴보며 말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고, 주방과 거실에 값나가는 가전제품이 많은데도 건드리지 않고 똑바로 2층 방으로 들어가 그 돈만 가지고 나왔다면, 그 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소행이다. 가족들 간의 문제는 가족들끼리 해결하고, 꼭 법으로 처벌하고 싶다면 뉴몰든 경찰서로 와서 고소장 작성해라.”
경찰이 돌아가고 내가 아주머니께 물었다. “거기에 돈이 있다는 거 누구에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그 여동생을 쳐다봤다. 사색이 된 그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인간말종이다. 자기 언니가 영어도 못 하고, 불체자라 신고 못 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주머니가 자기 일 나가야 하는데 늦었다고 차 좀 태워주면 안 되겠냐 물으셨다. 나도 비행 클럽 가입하러 나갈 참이어서 태워드렸다. 차에 타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리셨다. 얼마나 서럽게 우시는지 그 감정이 전해져서, 나까지 눈물 날뻔했다, 씁쓸했다...
댓글목록
영국보틀님의 댓글
정말 힘든 사람 등쳐먹고 고혈을 빠는 얼빠진 놈들이 많았군요
어찌 가장으로 자기인생을 잘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은인의 돈에 쉽게 손댈생각을 할까요






내가 쓴 글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