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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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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Dave0723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0.♡.64.141) 댓글 0건 조회 24회 작성일 26-04-0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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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일 목요일이 시험일이었다. Diagnostic Test라고 하는데, 입학 예정자의 수학 능력을 진단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결과를 토대로 그룹을 편성하는데, 고득점자는 Advanced 그룹으로 경제 모델링 심화 교육과 튜토리얼을 받는다. 상위 그룹에는 연구 성과가 뛰어난 박사생이 조교로 배정됐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Supportive 그룹으로 보충 수업을 받는다. 조교 중에 교육에 특화된 박사생이 배정되는데, 친절하게 잘 가르치는 조교가 배정됐다.

 

토론 그룹을 편성할 때도 시험 점수를 지표로 삼았다. 공무원, 직장인을 위한 실무 중심 토론 그룹과 학부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위한 이론 중심 토론 그룹을 편성하는데, 토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고르게 배치하는 지표로 활용했다. 수학 캠프가 유치하다고 시험을 안 치르면 본인만 손해다. 교수님이 학생의 실력을 모르기 때문에 임의로 아무 그룹에나 넣어 버린다. 석사과정 한국인 11명은 모두 상위 그룹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인끼리는 같은 토론 그룹에 배정되지 못했다. 교수님이 의도적으로 한국인을 서로 다른 그룹에 넣으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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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E 캠퍼스>


학기 시작 후 1주일간 웰컴윅이라는 환영 행사가 이어졌다. 학과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교수들과 인사하고, 수강 신청 가이드, 학칙 설명, 캠퍼스 투어가 있었고, 학습 스킬 워크숍도 열렸다. 학생 서비스 센터를 통해 의료, 주거, 교통, 비자 등 여러 면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는데, 상당히 만족도가 높은 서비스였다. 이름이 어려워 별도의 호칭을 사용할 때도 학생 서비스 센터에서 도와줬다.

 

주로 아시아 학생들의 이름이 어려웠는데, 일본인은 이름에 받침이 거의 없어서 부르기 쉬웠다. 고집 때문인지 이름이 어려워도 호칭 안 만들고 자기 이름 사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중국인이 특히 그랬다. 한국인은 부르기 쉬운 철자 하나만 사용하기도 했다. , , , 수 이런 식으로 사용하거나 호야, 미니, 지니, 제니 이런 식으로 늘려 사용하기도 했다. 학생 서비스 센터에 말하면 호칭 신청서를 주는데, 본인의 법적 이름 옆에 있는 Known as 항목에 호칭을 써서 제출하면 된다. 졸업장과 성적표에는 법적 이름이 사용되고, 수업 명단이나 이메일, 학생증 등에는 호칭이 사용된다.

 

호칭을 사용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세인트 마틴으로 간 동생은 영국에 눌러앉을 생각으로 온 녀석이라 어학원에서 사용한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 동생 이름은 한국인에게도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내 이름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어떡할지 고민했다. 그냥 본명을 쓰다가 주변에서 어려워하면 그때 가서 호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외국 친구들이 처음에는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더니 금세 적응이 됐는지 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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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첫 강의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교수님이 The Sun이라는 찌라시를 들고 오셨다. 신뢰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쓰레기로 취급받는 잡지였다. 항상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로 관심받으려는 관종들이 만든 잡지다. 명문대 교수님이 저런 걸 왜 들고 다니시는지 의아했다. 교수님이 글 하나를 읽어 주셨는데, 내용은 이랬다. 뉴욕에 사는 20살짜리 여자 A, 자신은 예쁘고 착한데 연봉 백만불 받는 남친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면서, 연봉 백만불 받는 사람은 자신에게 연락 달라며 이메일을 적어놨다.

 

강의실에 실소가 터졌다. 그 여자를 조롱하는 말도 나오고, 외모지상주의를 한탄하는 말도 나왔다. 교수님이 학생들을 진정시키며 말씀하셨다. “경제학도 입장에서 여성의 요구 조건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조언이나 문제점을 말하라.”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교수님이 찌라시를 들고 오신 의도를 파악한 것 같았다. 다들 머릿속으로 논리적인 답변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한 사람씩 손들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경제학도가 갑자기 도덕 선생이 되질 않나, 철학자 모드로 답하는 학생도 있었다. 사실 어떤 학문이든 깊이 있게 공부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철학을 만나게 되는데, 지금은 교수님의 요구에 따라 경제학도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때였다. 교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학생들은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이다. 앞으로 겪게 될 강의 수준이나 학업량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수준이었다. 수준 낮은 뻘소리 뒤에는 제법 들어줄 만한 답변들도 나왔는데, 굉장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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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파 창시자들, 계보를 잇는 저명한 학자들이 수백 명이다.>


경제학에는 여러 학파가 존재하는데, 학생들의 답변을 들어보면, 그 학파들이 모두 나왔다. 고전학파, 케인즈학파, 시카고학파, 마르크스학파, 오스트리아학파 등 학생들의 경제 성향에 따른 흥미로운 답변들이 날 미소짓게 만들었다. 대서양 건너 골빈녀의 뻘글 하나가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비효과를 떠올리며 웃었다. 이 수업에서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이 사회에 나가 미칠 영향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뻘글이 아주 쓰레기는 아닌 듯했다.

 

나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실용적으로 다양한 이론을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실증주의 경제학(positive economics), 여러 사상을 통합하며, 수학적 모델링과 실증 분석을 통해 정책 효과를 검증하는 주류 경제학(eclectic mainstream economics)이 내 스타일이다. 학파 간 논쟁을 넘어 '무엇이 효과적인가'를 따지고, 사실 기반 예측에 중점을 두는 스타일이라 편향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는 달랐다. 편향적 사상을 가지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정작 중요한 것은 못 보는 경우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교수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셨다. 순간 놀라서 움찔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수줍은 소녀처럼 살며시 손을 들었다. 나에게 의견 없느냐고 물으셨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을 했다. 교수님이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것이 놀라웠다. 교수님이 내 이름을 기억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내 석사 지원서를 보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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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저널 
Economic Modelling>


3학년 여름 방학 때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지도 교수님이 보시더니 잘 썼다고 심사 한번 받아보자면서 내 논문을 다듬어 주셨다. 10개월 정도 심사를 받고, 4학년 때 학회 저널 Economic Modelling에 등재됐다.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예측하기 위한 수리·통계적 모델 개발에 중점을 둔 저널이었다. 지도 교수님을 공동 저자로 올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 생에 첫 SSCI급 논문이었다.

 

상급 저널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급 이상은 되는 저널이다. 석박사도 등재하기 어려운데, 학부생이 쓴 논문이 등재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물론 공동 저자로 교수, 석박사들 따까리로 잡일 하다 이름을 슬쩍 올릴 수는 있다. 교수님은 내가 이름만 올린 놈인지 아닌지 궁금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석사 지원 시 밝히지 않은 이력이 있었다. 오만하게 보일까 봐 안 썼는데, 학회 저널에 도전해 볼 만한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능력 없는 놈에게 SSCI급 논문이 가당키나 하겠나? ‘보고 싶으시다면 보여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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