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일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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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폰이 나오기 전에는 국제 전화 카드를 많이 사용했다. 한국에서 인터넷 전화기와 국제 전화 카드가 많이 나왔지만, 유학생들은 보통 영국에서 판매하는 카드를 사용했다. 카드 뒷면을 동전으로 긁어 사용하는 카드였는데, 저렴하면서 통화 가능 시간이 많이 들어있는 카드였다.
2001년 9월에 싸이월드 미니 홈피가 오픈하면서 전화보다 홈피 방명록을 많이 이용했다. 그 시절 20대는 대부분 미니홈피를 이용했다. 다들 홈피 꾸미느라 바빴는데, 나도 그랬다. 도토리를 구매해 BGM을 사고, 미니 홈피를 꾸몄다. 친구들과 1촌을 맺고, 파도타기로 다른 친구들 홈피에 방문해 글 남기는 일이 일상이었다.

<추억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미국으로 유학 간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이 올린 사진을 보니, 친구들이 그립기도 하고, 화창한 대륙 날씨가 부럽기도 했다. 친구들이 내 방명록에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물을 땐, 울적해서 답을 달지 못했던 적도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친구들과 함께 갈 걸 하는 뒤늦은 후회도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친구들에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스카이다이빙 클럽에 가입했다. 비행클럽도 그렇고, 스카이다이빙 클럽도 입문 과정에서 돈이 많이 들지, 라이선스 취득하고 나면 큰돈 나갈 일은 없었다. 입문할 때 교육비가 학생 할인받아서 2~3천 파운드 정도 했다. 나는 그 과정을 생략해서 돈이 들지 않았다. 회원들이 모두 학생이라 군 출신이 없었다. 클럽에 군 출신 관련 규정이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패스파인더 HALO 훈련 모습>
Pathfinder라는 병과였는데, 패스파인더는 영국군이 원조였다. 영국군이 미군을 가르치고, 그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카투사도 패스파인더가 될 수 있었다. 뭐 하는 부대인지 아는 영국인이 많아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카투사의 군 복무 기록은 미군에게 요청하면 발급해 줬다. 한국의 병무청은 병과만 기록할 뿐 복무 중 훈련받은 내용은 알지 못한다. 미군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고고도 강하 횟수 기록을 발급받아 제출하고, 안전 교육만 별도로 이수 후 라이선스를 받았다.

<팀 별로 포메이션 점프를 하고 놀았다.>
라이선스 종류가 A부터 D까지 있는데, 종류에 상관없이 라이선스를 취득하면 솔로 점프가 가능했다. 1회 점프 비용이 15파운드였다. 매번 갈 때마다 3회 이상 점프하고 돌아왔다. 회원들과 포메이션 점프하면서 노는데, 체공 시간은 1분 미만이었지만, 상당히 재밌었다. 매주 모임이 있었는데, 다른 취미활동도 있어서 한 달에 한두 번만 참여했다.
비행클럽에서 만난 한국인 중에 삼성전자 런던 법인에서 근무하는 대학 선배가 있었다. 나보다 14살 많은 대선배였다. 비행기 지분을 가지고 계셨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파셨다. 비행기는 자동차와 다르게 가치가 잘 안 떨어진다. 2001년에 85년식 세스나 210C 기종이 6만 파운드였는데, 26년 현재 같은 기종, 같은 연식이 30만 파운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올랐다는 소린데, 이건 overhaul이라는 부품 교체 작업으로 기체 상태를 공장 출고상태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나의 애마 세스나 210C>
보통 비행시간 3~5천 시간이면 오버홀 작업을 하는데, 할 때마다 비용 수만 파운드가 지출되고, 그만큼 기체의 가치도 올라갔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25년이 흐르는 동안 6만 파운드가 30만 파운드까지 올라갔다. 지금은 희소성 때문에 더 비싸다. 8명이 7500파운드씩 지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버홀 작업비를 분담해서 지분이 1만 파운드가 됐다. 1만 파운드에 팔아야 하는데, 7500파운드에 주셨다. 1인당 월 고정비는 104파운드였다. 10개월 가지고 있어도, 되팔 때 손해는 없었다.
지분이 생기면서 1박 2일, 2박 3일 여행이 가능해졌다. 기름값은 시간당 4.5파운드였다. 그때는 항공유가 굉장히 저렴했다. 1시간 거리에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가 있어서, 심심할 때 자주 갔다. 영국을 벗어나 유럽 여행 다니면서 장거리 비행 횟수가 늘어나고, 돈을 많이 썼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놀아볼 수 있겠냐는 생각으로 돌아다녔다. 유학 마치고 귀국할 때 제값 받고 처분했으니 손해 본 것도 없었다.
집 근처 Commonwealth 기숙사에서 테니스 클럽에 가입했다. 심심할 때 한두 시간씩 테니스 치고, 기숙사 뒤쪽에 있는 농구장에서 양키들과 농구도 했다. 학교 선배들과 골프 치러 다니고, LSE 동생들과 바비큐 파티하러 런던 근교로 돌아다녔다. 콘월과 노퍽에서 소형 요트를 빌려 낚시하고, 코츠월드로 그림 그리러 다녔다. 온종일 한가지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어서, 놀거리가 금세 떨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집안에서 궁상떨 것 같아서, 뭐라도 하려고 계속 돌아다녔다. 영화, 뮤지컬, 물담배 카페, 심지어 게이바에 구경도 갔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사진을 많이 찍어 홈피에 올렸다. 친구들에게 난 잘 지내고 있다고 보란 듯이 사진을 올렸지만, 사실 외로웠다. 학기 초에 외로움 타는 한국인이 어디 나 혼자였을까? 친구 생기기 전에는 많이들 겪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스트본에서 함께 온 동생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놀거리가 떨어진 주말 저녁에 동생들과 고기 구워 먹거나, 록밴드 구경하러 작은 클럽에 놀러 가곤 했다. 내가 친동생처럼 아끼는 동생 중에 에릭이라는 동생이 있는데, 수염 난 지상렬을 닮은 동생이었다. 엄청 웃기고 재밌는 동생이었다. 동생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던 때, 클럽에 함께 갔다.
“햄요, 절마가 자꾸 박경림을 놀린다.”
“박경림이 왜 나와?”
“함 들어보이소, 노처녀 박경림이라 카는데?”
록 가수였는데, 샤우팅이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Don't turn your back on me.” “돈쳔녀 배컨미”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너는 달팽이 관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저게 노처녀 박경림으로 들리냐?”
동생이 CSM에서 파운데이션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패션 브랜드 타미힐피거 창립자의 딸도 다니고 있었다. 그 딸내미 이름이 애비 힐피거였는데, 동생 놈이 애비랑 친해지고 싶어서 따라다녔던 모양이다. 하루는 애비가 짜증 났는지, 동생한테 피썹이라고 욕을 했다. 동생이 못 알아듣고, 나에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데 답해주기 정말 곤란했다. “Peace가 필요한 것 같으니, 그냥 내버려 둬...”

<파워 보트인데, 소형 요트로 분류된다.>
10월은 한국인들끼리 친목 다진다고 모임이 많았다. 나도 같은 학과 한국인들끼리 친목 다진다고 뱃놀이를 떠났다. 템스강에서 보트와 요트를 빌릴 수 있었다. 모터로 움직이는 보트를 파워 보트라고 불렀다. 돛이 달린 배는 요트인데 라이선스를 취득해야 빌릴 수 있었다. 예외로 돛이 없는 12인승 미만의 소형 요트는 빌리는 것이 가능했다. 모터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요트 라이선스가 없어도 빌릴 수 있었다. 항해술이 필요 없는 강에서만 탈 거면 라이선스 없어도 빌릴 수는 있다. 렌트비는 3시간 기름값 포함 100파운드였다. 그때는 연장자가 돈 내던 시절이었다. 연장자랑 함께 다니면 동생들은 돈 쓸 일이 없어서 좋았다.
런던대에서 한국인들 친목 도모하라고 한인 학생회에 돈을 줬다. 얼마를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각 학교 한인 학생회에 공지가 돌았다. 10월 마지막 주 금요일 밤에 클럽 하나를 전세 낸다고, 한국인은 누구나 환영한다는 공지였다. 런던대 소속이 아니어도, 한국인이면 오케이였다. 임페리얼 컬리지도 런던대와 별개로 한인 축제를 하겠다며, 공지를 돌렸다. 걔들도 학교에서 돈을 받은 모양이었다. 11월 첫째 주 금요일 밤이었다. 걔들은 왜 그렇게 독립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는데, 2001년에 이미 가열차게 독립 투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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